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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퀴즈로 보는 세상

2020-06-04 07:04:39

한광석 신부·대전가톨릭대학...
더운 날씨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상황이라면, 두 개의 퀴즈를 풀어보자. 첫째 퀴즈는 격투기 경기 승자를 맞추는 문제이다. 같은 체급의 두 선수 A와 B가 있다. A 선수는 손을 뒤로 묶고, B 선수는 눈을 가린 채 경기를 진행하면 누가 이길까? 둘째 퀴즈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싸움 상대는 누구일까?'이다.

첫째 퀴즈의 정답은 눈을 가린 B 선수이다. 발을 사용할 수 있는 격투기 경기라면 당연히 손이 뒤로 묶인 A 선수가 이길 텐데, 왜 그럴까? 이유는 '보이는 게 없으니까'이다. 둘째 퀴즈의 정답은 보이지 않게 하는 투명망토를 쓴 선수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무언가에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와 보려고 온갖 노력을 해도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점에서 그렇다. 보이는 게 없으니 이긴다는 유머는 씁쓸한 역설이 담겨 있다. 이에 비해, 가상 상황이더라도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에는 공감이 간다.

시각은 존재를 알아보는 효과적인 감각이다. 다른 감각을 통해서도 무언가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시각은 그보다 먼 거리에서 인지한다는 점에서 훨씬 월등하다. 나를 해치는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더 큰 두려움이 몰려온다. 바이러스나 세균이 곰팡이만큼이라도 눈에 보였다면 이렇게 모든 게 두렵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 자연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한계는 기술로 극복되곤 한다. 인간 능력으로 감지할 수 없는 적외선이나 자외선, 초음파 감지 장비를 이용하면 눈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바이러스의 구조나 병리 기전도 적절하게 처리해 전자현미경으로 밝혀낼 수 있다. 보려는 의지가 있다면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 무언가 알 수 있다. 문제는 의지와 방법이다.

의지가 없다면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 자기 눈에 빨간 색안경을 끼고 큰불이 났다고 계속 외치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하다. 어떤 목적으로든 거짓 뉴스를 생산하는 이들도 문제지만, 많은 정보를 보지 않고 각종 대화에서 큰 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불편함을 준다. 보이는 게 없으니 이긴 첫 게임의 승자를 보는 듯하다.

의지는 방법을 찾아낸다. 의욕은 어려움과 한계에서 도드라진다. 위기는 얇은 허상으로 가려진 사회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고통 앞에서 우리에게 부족하지만 필요한 무엇을 찾는다. 그렇다면, 현재 지구공동체가 직면한 상황에서 무엇이 없을까? 누구는 희망이라 답하고, 누구는 신이라 답한다.

전 세계가 사상 초유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고, 폭력과 야만, 국가 이기주의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선진국도 없고, 사회 안전장치도 없다. 기도가 기적을 낳지 않았고, 코로나는 특정 종교에 차별적인 혜택을 베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종교의 위기 또는 종말을 선언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제도 종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 한계 앞에서나 과학발견을 통해서 또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며 존재의 지평이 확장된다면 종교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체험이 물질과 보이는 것만이 존재 의미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준다면, 종교는 오히려 어둠과 절망 속에서 더 깊은 곳으로부터 개개인 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확산한다.

이러한 종교의 온도는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정의가 없는 평화는 없다"는 구호 아래 하나로 뭉친 세계시민의 연대 행동에서, 자신의 재산을 털어 고국 인도의 대이동을 돕는 영화배우의 결단에서, 방호복과 보호 고글로 짓무른 육신을 일으키며 다시 응급실로 뛰어가는 의료진의 발걸음에서 참으로 종교적인 무엇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눈으로 이 시대가 보여주는 징표를 식별하고 종교의 참된 길, 곧 '오래된 쇄신'의 길을 걸어갈 때이다. 종교는 보이는 것을 넘어 존재를 떠받치는 무한과 나의 관계를 쇄신하는 가운데 죽고 새로 나기 때문이다.

한광석 신부·대전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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