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검색 입력

'기생충' 그 이상, 정재일 음악의 광활한 파노라마

2020-02-16 12:59:05


▲정재일 단독콘서트 '정재일 인 콘서트' 모습 [블루보이 제공]
형형한 바이올린 독주 선율이 공연장을 휘감더니 배경화면에 곡명 '짜파구리'가 떠올랐다. 관객석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터졌다.

영화 '기생충' 속 '짜파구리' 요리 장면에서 긴박감을 끌어올리는 이 곡이 현실 무대로 옮겨지자 생동감이 배가됐다.

'짜파구리'는 물 흐르듯 기생충의 또 다른 대표 OST(오리지널사운드트랙) '믿음의 벨트'로 이어졌다. '기생충' 음악감독 정재일이 연주하는 피아노, 강이채 바이올린, 그리고 현악 오케스트라 '더 퍼스트' 협연은 스크린을 떠난 OST에 독자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지난 15일 용산구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에서 열린 정재일 단독 콘서트 '정재일 인 콘서트'에서는 '기생충' 등 영화음악을 비롯해 대중음악, 국악, 연극, 미술 등 장르와 영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약한 정재일 음악의 진면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날 정재일은 그동안 작곡가, 연주자, 음악 감독 등 전방위 음악 창작자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내놓은 17곡을 2시간 20여분 동안 집약적으로 선보였다.

'기생충'뿐만 아니라 영화 '오버 데어'·'옥자'·'해무', 연극 '그을린 사랑',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전시 '더 모먼트', 소리꾼 한승석과의 음악작업 등 각자 다른 맥락에서 탄생한 음악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놀랍게도 '정재일 음악세계'라는 고유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퍼포머로서 정재일, 그리고 함께한 뮤지션들 역량이었다. 무대 왼쪽에는 사물놀이 '느닷' 팀 등 국악 연주자들이, 오른쪽에는 현악 오케스트라 '더퍼스트'가 자리해 때로는 따로, 때로는 함께 다채로운 소리를 빚어냈다.

정재일은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드럼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며 동서양 악기 협연을 이끄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공연 중간중간 멘트는 자신을 내세우는 대신 함께 무대를 꾸민 뮤지션들을 소개하는 데 할애했다.

'기생충' 음악 속 숨은 공신들도 그렇게 만났다. 정재일은 '믿음의 벨트'와 '짜파구리'를 "엉터리 바로크 음악"이라고 다소 수줍게 칭하며, 바이올린 솔로를 담당한 강이채에 대해 "클래식도 이해하면서, 빗나가기도 하고 절뚝거리기도 하는 기분을 잘 이해해줄 사람으로 적격이었다"고 했다.

정재일과 오랫동안 오케스트라 작업을 함께한 '더 퍼스트' 팀은 '기생충' 음악의 모든 현악 파트를 담당했다고 한다. 이들과 함께하는 기생충 음악은 "세계 초연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정재일은 전했다.

정재일이 그동안 천착한 우리 전통음악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 공연이기도 했다.

정초 행운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전통음악 '비나리'는 휘몰아치는 피아노와 국악기 향연에 젊은 소리꾼 김율희의 창이 어우러져 공연 초반 관객을 휘어잡았다.

창작타악그룹 푸리의 '이동' 앨범에 있는 '셋, 둘'은 강렬한 국악 연주에다 정재일의 일렉기타, 베이스, 드럼까지 이어지며 공연 후반부 분위기를 한층 고조했다. 열정적으로 드럼을 치는 정재일 그림자가 공연장 벽에 드리워지며 시각적으로도 압도했다. 연주를 마치고 정재일은 "한국 타악이 이렇게 강력하다는 걸 꼭 들려드리고 싶었다"고 힘줘 말했다.

한승석과 정재일의 2014년 앨범 '바리 어밴던드'(abandoned) 수록곡인 '건너가는 아이들'과 '아마, 아마, 메로 아마'에서는 배우 정영숙이 내레이터로 등장했다.

'바리 어밴던드'는 바리공주 설화를 모티브 삼아 시대를 성찰한 앨범으로, '건너가는 아이들'은 난민 어린이들의 고단한 여정, '아마, 아마, 메로 아마'는 네팔 이주노동자의 외로운 죽음을 소재로 했다. 마치 어머니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정영숙의 낭독은 두 노래가 바라본 시대의 아픔을 입체적으로 느끼게 했다.

공연 말미 영화 '해무' OST 'am 7:37'의 장엄한 연주가 지나고, 연극 '그을린 사랑' 속 음악 '트루스'(truths)의 오롯한 피아노 독주에 관객은 일제히 숨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17세에 한상원, 정원영, 이적 등으로 구성된 밴드 긱스 멤버로 활동하며 '천재'로 불렸고 경계 없는 음악 행보를 구사하는 정재일이지만 그의 음악세계를 독자적으로 만날 자리는 드물었다. 그래서 이번 콘서트도 팬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으며 티켓 오픈 뒤 순식간에 매진됐다.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역량을 발산한 전천후 뮤지션은 "저는 더 뭔가 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하는 소박한 마무리 인사를 남기고 총총 퇴장했다. 앙코르 요청에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에게 들려드리려 작곡한 곡이라며 '디어리스트'(dearest)를 초연으로 선보였다.

[연합뉴스]

  • COPYRIGHT© Daejonilbo.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