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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3.1운동 100주년] 인정 넘치는 오일장…그 속엔 을미의병의 함성이

이용민 기자 | 2018-10-10 11:29:29


▲금강에서 본 와야동 일대.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유성서 공주로… 문석봉 의병 발자취

대전 유성보건소 거리에는 매월 4일과 9일로 끝나는 날에는 5일장이 들어선다. 평소에는 유성시장 구역 안 가게들만 문을 열지만 장이 서는 날에는 시장 주변 일대가 모두 장터로 변한다. 대도시 한복판이지만 좌판을 깔아놓고 나물이며 과일이며 파는 할머니와 멀리서 들려오는 뻥튀기 소리는 영락없는 시골 장터다.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정감어린 곳이지만 한 켠에서는 외세에 맞선 우리 민족의 긍지를 엿볼 수 있다. 장터공원에 놓여 있는 유성의병사적비는 '을미의병의 효시'라는 말로 충청 지역이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된 이유를 설명한다. 사적비는 이곳 장대동을 대전일대의 사민들이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국에서 가장 먼저 병사를 일으킨 역사적 현장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문석봉은 무과출신으로 충남도 진잠 현감을 역임했다. 1894년 11월에는 양호소모사에 임명돼 공주감영에서 근무했다. 동학군 진압에도 출정해 공을 세웠지만 항일의 뜻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군에 대적하기 위해 관군을 훈련시켰다는 죄목으로 실형을 받기도 했을 정도다.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인 1895년 8월 문석봉은 명성황후의 시해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천고에 없는 강상의 큰 일이 일어났다"고 통분하며 국모의 복수를 위해 의병을 일으켜 흉적을 토벌하겠다고 다짐했고 9월 18일 유성장터에서 의병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먼저 회덕현 무기 무기고를 급습해 탈취한 무기들로 300여명의 의병을 무장시켰다. 무기고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단지 당시 회덕현 관아 자리였던 현재 회덕2동 동사무소 우측 공터에서 멀지 않았으리라고 추측될 뿐이다. 무기를 갖추고 다시 유성 장대리에 모인 의병들은 창의 40일만인 10월 28일 공주를 향해 진격했다. 공주관아를 선점해 지리적 이점을 얻겠다는 계획이었다.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은 200명의 군사로 대응케 했고 의병부대는 공주 와야동(현재 소학동)에서 일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미리 매복해 있던 관군의 기습 작전에 의병은 패해 흩어지고 만다.

유성장터와 함께 공주시 와야동도 을미의병사에서는 중요한 곳이다. 와야동은 문석봉 의병이 전투를 벌인 유일한 장소다. 현재 공주시 상왕동 산 70-1, 824 일대로 일부는 야산으로 남아 있고 일부는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전투지의 근처에는 와야교란 옛 다리가 남아있어 자료에 나오는 와야동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문석봉은 후일 체포돼 대구부에 구금됐지만 공초를 받는 과정에서도 거사를 일으킨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는 옥에서 탈출해 재봉기를 도모했지만 병을 얻어 11월 19일 46세 일기로 눈을 감고 만다. 뜻을 채 펼쳐보기도 전에 사그라들었지만 유성의병은 을미의병의 효시로서 단발령 공포 후 전국적으로 의병봉기에 불을 당기는 계기로 의미가 크다. 이는 후에 3·1 운동 정신으로 전해졌고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의거의 뿌리가 됐다.



◇장터에서 장터로… 사람과 뜻이 모이는 곳

유성의병의 정신은 공주 독립만세시위로 이어졌다. 공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이며 475년 백제가 수도를 한성에서 공주로 옮겨지면서 한반도의 중심도시로 부각됐다. 538년 도읍이 부여로 옮겨간 후에도 충청 지역의 거점 도시로 발전했다. 사람과 일제강점기에는 만세 시위운동, 동맹 휴교 투쟁, 사회 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민족 운동이 전개됐고 독립운동가도 다수 배출했다.

공주 유구 우시장에서의 독립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4일 황병주의 주도로 전개됐다. 그는 유구 우시장에 나가 군중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고, 3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당시 순찰 중이던 일제 경찰이 독립만세를 부르지 못하게 저지했지만 오히려 군중이 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당황한 일제 경찰은 황병주를 체포해 유구주재소로 연행했다. 황병주의 연행 사실이 알려지자 군중 100여 명이 주재소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현우석·안만원 등 10여 명이 주재소를 공격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일제는 군경 12명을 급파했고 30여 명이 체포당했다. 이 만세시위로 황병주 등 21명이 징역 6월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곳은 현재 공주시 유구읍 석남리 249 일대로 도로 및 상가 등 건물이 들어서 당시의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같은해 4월 1일에는 정안장터 독립만세시위가 이어졌다. 당시 공주군 정안면 석송리의 이기한과 이병억은 마을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도록 호소해 주민 20-30여 명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면소재지인 광정리로 행진했다. 이어 내송리에서 운궁리 주민 등 20명이 합세했다. 광정리에 도착한 군중들은 정안장터로 이동해 독립만세를 불렀다. 특히 일본인 정미소를 둘러싸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주재소로 이동해 삽과 곡괭이 등으로 건물을 파괴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 시위로 이기한 등 23명이 징역 3년, 징역 1년, 징역 10월, 징역 8월, 구류 25일 등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안장터 역시 이곳이 독립만세운동이 열렬히 펼쳐졌던 곳이란 사실을 알 수 없게 변해버렸다. 일본인 상인들의 상점 형태가 일부 남아 있지만, 대부분 당시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은 물자와 사람이 넉넉해져 5일장이 사라져 가는 추세다. 의병의 기치를 든 곳도 독립의 열망을 외친 곳도 모두 장터다. 사람과 뜻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전 장터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이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시민들의 소통의 공간이었다. 장터에서 장터로 항일저항운동이 이어진 건 당시 평범한 민초들도 일제의 만행에 비분강개해 의기투합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용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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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병이 전투를 펼친 와야동 일대 전경.사진=독립기념관 제공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진 공주 유구 우시장터 모습.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최초의 을미의병인 유성의병의 이동도.자료=독립기념관 제공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진 정안장터.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유성의병사적비. 사진=유성구청 제공

▲유성의병사적비. 사진=유성구청 제공

▲충남 공주시 중동 3.1중앙공원에는 유관순 열사가 영명보통학교(현 영명중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유관순열사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공주시 제공

▲충남 공주시 중동 3.1중앙공원에는 유관순 열사가 영명보통학교(현 영명중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유관순열사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공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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