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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강연·문맹퇴치 힘써…항일의식·힘 키우는데 앞장

박계교 기자 | 2018-10-03 13:18:31


▲서산지역 어느 곳보다 1919년 3·1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던 곳은 현재의 해미면으로, 주무대는 해미장터였다. 사진은 해미읍성 앞 해미장터 사진=해미면행정복지센터 제공
서산지역은 한말 동학혁명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천도교의 위세가 강력했기 때문에 3·1운동 시위가 격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 당시 서산지역은 서산읍을 시작으로 해미·팔봉·운산·성연·음암 등 모두 12건의 만세운동이 있었다.

3월 중순에서 4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3·1운동은 많게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몰릴 만큼 투쟁적으로 이어졌다.

서산지역의 3·1운동은 야간에 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면서 만세시위를 한 점이 특징이다.

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항거해 서당을 개설하거나 승려가 돼 법회를 통해 민족의식을 강조했고, 일본어교육을 반대하는 등 항일운동을 지속 했다.



◇서산 해미장터

서산지역 어느 곳보다 1919년 3·1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던 곳은 현재의 해미면으로, 주무대는 해미장터였다.

1919년 3월 16일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각기 예배를 마친 뒤 해미장터에서 행진을 했고, 수천 명의 군중들이 시가지를 누비면서 시위를 전개했다.

3일 뒤인 19일에는 남상철이 주도하는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했는데, 이 운동을 주도한 남상철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구금됐다.

3월 24일에는 해미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가 된 3·1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서산지역에서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나선 첫 사례로 기록됐다.

해미만세운동은 해미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이계성이 불을 지폈다.

해미면 기지리 출신으로 해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이계성(1901-1976)은 해미면 저축조합 서기로 근무하다 해미면사무소 서기로 채용, 이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 했다.

그는 당시 해미 천주교도 한병선과 서울에서 온 정(鄭) 신부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입수해 야간에 숙직할 때 이를 다량으로 복사 했다.

3월 24일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고별식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계성은 해미면 동암리 후배인 김관용(1900-1945)를 만나 "다른 학교에서 모두 조선의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데도 우리 학교만이 이를 하지 않는 것은 심히 유감이다. 오늘 밤 만세를 불러야 한다. 그래서 당교 학생들만으로는 소수이니, 졸업생 2-3명과 야소교도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설득해 승낙을 얻어냈다.

또 유세근을 찾아가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기독교 신자인 김병선을 만나 기독교도들의 참가를 권유하는 등 이날 '해미면 만세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

이계성의 권유를 받아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관용은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반 반장으로, 1919년 3월에 갓 졸업한 학생이었다.

이날 저녁 7시경 읍내리에 있는 음식점 박선양 집에서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고별식이 있었는데, 모임이 끝난 뒤 김관용은 참석자들에게 이계성의 뜻을 전달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호소했다.

졸업생 이봉이, 유한종, 최흥양과 재학생 장기남, 양태준, 이기신, 기독교인, 주민 등은 밤 11경에 집결해 해미면의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렸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남문과 서문을 지나 읍내리 면사무소와 우시장에서 김관용의 선창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김관용은 "우리나라 자주독립을 위해 학생들이 앞장서자"고 강조를 한 뒤 시위대 맨 앞에 서서 졸업생들을 선도했다.

이들은 해미주재소로 향하던 중 출동한 일본경찰과 충돌했으며, 200여명이 검거되고 이중 21명이 서산경찰서로 붙잡혀 갔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일로 체포된 이계성은 4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고, 그는 항소했으나 6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 돼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형을 마친 그는 후학에게 한학을 가르치고, 일본어 교육을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일본 헌병들의 감시가 극심해 항일투쟁이 어려워지자 은둔생활을 하며 강연, 대담 등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 준 그는 혈육자손이 없이 1976년 10월 5일 타계했다.

해미독립운동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는 1996년 국가보훈처장에게 이계성의 독립운동 공적서를 제출,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김관용도 보안법위반으로 1년형을 선고 받고 공주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1920년 출소한 그는 일본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서산시 개심사와 예산군 수덕사, 공주시 마곡사 등을 전전하면서 승려(법명 서하스님)로 변신, 법회와 강연 등을 통해 독립운동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했고, 그의 유해는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정됐다.

이외에도 이날 체포된 이들은 징역을 살거나 태형 90대, 기소유예로 풀려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한 부끄럼 없는 죗값을 치렀다.



◇천도교 서산종리원(신간회 서산지회 창립지)

천도교 종리원은 제3대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사후 중앙과 지방에 있었던 천도교의 사무 행정 기관이었다.

서산지역은 내포 농민전쟁의 진원지라 이야기 될 만큼 동학의 교세가 강했고, 이런 교세는 천도교 창립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 말부터 천도교 서산종리원(서산시 읍내동)을 중심으로 왕성한 포교 활동을 펼친 결과 1920년대 초반 서산지역의 교도 수는 500-600명에 이르렀다.

3·1 운동 이후 천도교 서산종리원은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1년 7월 천도교 청년회 동경지회 순강단이 서산교구실에서 500명의 청중을 모아 놓고 강연회를 개최한 것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당시 천도교 서산교구장은 이종만이었는데, 이종만은 1924년 12월 '공산주의 강령 및 선전문을 휴대했다'는 혐의로 천도교 청년 당원 박래홍, 조기간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구금됐다.

1931년 1월 천도교 서산종리원은 여러 사회단체들과 연대해 물가 인하를 요구하는 시민강좌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당시 천도교 종리원 측이 당국자와 교섭해 인하를 요구한 것은 차가료·차지료, 이발료, 전등료, 운송료, 자동차 운임, 쇠고기 값·돼지고기 값 등이었다.

천도교 서산종리원에는 서산천도교청년회가 설립돼 활동했고, 서령청년회와 신간회 서산지회도 이곳에서 창립했다.

신간회 서산지회는 1928년 4월 22일 일제의 방청금지 등 삼엄한 분위기 속에 천도교 서산종리원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돼 회장에 이원생을, 부회장에 이용기를 각각 뽑았다.

창립당시 회원은 70여명이었다.

신간회 서산지회는 서령청년회·서산청년회·서산청년동맹·서산노동청년회 등 서산지역 사회운동단체들이 합동해 결성했다.

이들은 순회강연회, 문명퇴치, 소비자조합운동을 통해 항일의식 고취와 민족 운동의 통합에 힘썼다.

2017년 10월 신간회 창립 90주년을 맞아 천도교 서산종리원과 신간회기념사업회 등은 이곳에 신간회 표지석을 세우고, 기념식을 가진 바 있다. 박계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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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지역 어느 곳보다 1919년 3·1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던 곳은 현재의 해미면으로, 주무대는 해미장터였다. 사진은 해미읍성 앞 해미장터 사진=해미면행정복지센터 제공

▲승려생활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김관용(사진 가운데)의 출가 후 사진 사진=해미면행정복지센터 제공

▲일제시대 해미장터 앞 해미읍성 사진=해미면행정복지센터 제공

▲서산시 읍내동에 자리한 천도교 서산종리원 사진=천도교 서산종리원 제공

▲서산시 읍내동에 자리한 천도교 서산종리원 사진=천도교 서산종리원 제공

▲2017년 10월 신간회 창립 90주년을 맞아 천도교 서산종리원과 신간회기념사업회 등은 이곳에 신간회 표지석을 세우고, 기념식을 가진 바 있다. 사진=천도교 서산종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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